끈기와 완성에 대한 실천적 성찰
서론: 사유의 마비와 행위의 우선성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최적의 방법을 찾고, 동기부여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이 역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때로는 사유가 행위를 가능하게 하지만, 때로는 사유가 행위를 마비시킨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그녀는 특히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썼다:
"행위는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세계에 새로움을 가져온다."
행위는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지 않는다. 행위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시작한다. 아렌트에게 '그냥 하기'는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자유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실존주의: 행위가 본질을 만든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6)에서 유명한 명제를 선언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는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만들어간다. 우리의 본질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결정한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드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리다."
당신이 끈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끈기 있게 행동하라. 당신이 일을 완성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일을 완성하라. 본질이 행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본질을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순환논리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 실존의 근본 구조다.
사르트르는 나아가 말한다:
"인간은 자유로 형벌받은 존재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조차 선택이다.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는 것도 선택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준비되지 않았어", "나는 재능이 없어", "조건이 맞지 않아"—이 모든 것은 사르트르가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고 부른 것이다.
키르케고르: 결단의 순간
키르케고르는 사르트르보다 한 세기 앞서 실존의 문제를 탐구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1843)에서 그는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을 대비시킨다.
심미적 실존은 끊임없이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것도 해볼까, 저것도 해볼까. 완벽한 선택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회전 병(rotation method)'이라고 불렀다—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지만, 진정한 의미는 찾지 못하는 삶.
반면 윤리적 실존은 '결단(the leap)'을 한다.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완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고 헌신한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 1844)에서 쓴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자유는 자신의 가능성을 들여다보고, 그 가능성의 무한함에 현기증을 느낀다."
우리가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자유의 현기증'이다.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우리는 마비된다. 완벽한 방법을 찾으려 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진정한 자아는 이 현기증에도 불구하고 '뛰어내리는(leap)' 순간에 형성된다.
그냥 하는 것은 이 뛰어내림이다. 계산 없이, 보장 없이, 단지 행위 그 자체로.
니체: 의지의 긍정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3-1885)에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말한다. 이것은 지배욕이 아니라 자기극복의 의지, 생성과 창조의 의지다.
니체는 이렇게 선언한다:
"낙타가 되고, 사자가 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진다—의무, 도덕, 타인의 기대. 사자는 이를 거부하고 "나는 원한다(I will)"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창조는 어린아이의 단계에서 일어난다. 어린아이는 계산하지 않는다. 놀이하듯, 자유롭게, 그냥 한다.
니체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운명애(amor fati)'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88)에서 그는 쓴다:
"나의 운명애의 정식: 어떤 것도 다르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다. 당신에게 재능이 부족하다면? 긍정하라. 조건이 완벽하지 않다면? 긍정하라. 그리고 바로 그 조건에서 시작하라.
니체는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188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의 공식: 성장인가, 아니면 소멸인가. 발전인가, 아니면 병리인가."
그냥 하는 것은 성장의 편에 서는 것이다.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는 것은 소멸의 편에 서는 것이다.
하이데거: 세계-내-존재의 실천성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인간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 규정한다. 우리는 추상적 사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미 세계 속에서 도구를 다루고, 일을 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존재다.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의 기본 양식을 '배려(Sorge)'라고 부른다. 우리는 항상 이미 무언가에 관여하고 있다. 순수한 관조는 파생적이고 이차적이다. 원초적인 것은 실천적 관여다.
하이데거는 쓴다:
"현존재의 존재는 배려다. 이 배려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투사한다."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도구분석(Zeuganalyse)'이다. 우리는 망치를 이론적으로 파악하기 전에 이미 망치질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키보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이미 타이핑을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손 안의 것(Zuhandensein)', 즉 도구적 실천의 우선성이다.
일을 완성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완성'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하기 전에 이미 완성해나간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이해는 행위 속에 있다."
그냥 하는 것은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우리의 본래적 존재 방식이다. 사유는 나중에 온다.
메를로-퐁티: 신체의 지혜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에서 신체를 단순한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체(corps vécu)'로 이해한다.
그는 쓴다:
"신체는 우리가 세계를 향한 우리의 일반적 매개다."
우리는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으로 안다. 피아니스트는 건반의 위치를 계산하지 않는다. 춤추는 사람은 각 근육의 움직임을 의식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습관적 신체(habitual body)'라고 부른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나온다: 끈기는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다. 완벽한 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체적 루틴이 필요하다.
메를로-퐁티는 계속한다:
"나는 나의 신체다(Je suis mon corps). 나의 신체는 나의 관점이다."
그냥 하는 것은 의식적 결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면, 의식이 따라온다. 자리에 앉으면, 글이 쓰인다. 이것이 신체적 지혜다.
비트겐슈타인: 언어게임과 실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에서 의미가 사용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단어의 의미는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우리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서 나온다.
그의 유명한 명제:
"언어의 의미는 그것의 사용이다(Die Bedeutung eines Wortes ist sein Gebrauch in der Sprache)."
이것을 행위에 적용해보자. '끈기'의 의미는 끈기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끈기 있게 행동하는 것에서 나온다. '완성'의 의미는 완성의 이론이 아니라 완성해내는 실천에서 나온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을 논증한다. 의미는 공적이고 사회적이다. 마찬가지로 끈기도 고립된 내적 의지가 아니라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 패턴이다.
그는 쓴다:
"규칙을 따르는 것은 실천이다(Einer Regel folgen ist eine Praxis)."
그냥 하는 것은 규칙을 이해하고 나서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과정 자체가 규칙을 체화하는 것이다.
푸코: 자기의 테크놀로지
푸코는 후기 저작에서 '자기 배려(souci de soi)'와 '자기의 테크놀로지(technologies of the self)'를 탐구한다. 그의 마지막 강의록 『주체의 해석학』(L'Herméneutique du sujet, 1982)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실천들을 분석한다.
푸코는 에픽테토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어떻게 일상적 실천(askēsis)을 통해 자기를 형성했는지 보여준다. 이것은 추상적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 훈련이다:
"자기 배려는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정한 작업이다."
푸코가 강조하는 것은 '파레시아(parrhēsia)', 즉 진실을 말하는 용기다. 그러나 이 진실은 이론적 진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되는 진실이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그냥 하는 것은 '자기의 테크놀로지'다. 매일 아침 책상에 앉는 것, 매일 정해진 시간에 운동하는 것, 매일 조금씩 진행하는 것—이런 작은 실천들이 우리를 만든다.
푸코는 경고한다:
"자기 배려는 자기애(narcissisme)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변형의 실천이다."
그냥 하는 것은 현재의 나에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나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들뢰즈: 생성과 차이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8)에서 창조적 행위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에게 반복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차이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들뢰즈는 쓴다:
"반복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성에 반대해서 행동하는 것이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반복은 고유하다. 오늘의 글쓰기는 어제의 글쓰기와 다르다. 이 차이가 축적되면서 완성이 일어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 1980)에서 '유목민적 사유'를 제안한다. 고정된 목표를 향해 직선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중요한 것은 출발도 아니고 도착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중간(le milieu)이다."
그냥 하는 것은 목적지에 집착하지 않는다. 과정 자체가 목적이다. 완성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실천적 지혜와 습관
현대 철학자들만 이 진리를 알았던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에서 핵심을 파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aretē)이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습관(hexis)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집을 짓는 것에 의해서 건축가가 되고, 리라를 연주하는 것에 의해서 리라 연주자가 된다.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워지고, 절제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하게 되며,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해진다."
이것은 순환논리처럼 보이지만, 깊은 통찰이다. 끈기 있는 사람이 되려면 끈기 있게 행동하라. 그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품이 되며, 성품이 운명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프로네시스(phronēsis)', 즉 실천적 지혜를 강조한다. 이것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능력이다:
"실천적 지혜는 보편적인 것만을 알아서는 충분하지 않다. 개별적인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천적이고, 실천은 개별적인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완벽한 보편적 계획은 없다. 오직 구체적 상황에서의 구체적 행동이 있을 뿐이다.
칸트의 역설: 의무와 자율
칸트는 도덕철학에서 의무(Pflicht)를 강조한다.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에서 그는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을 제시한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흥미롭게도 칸트는 도덕적 행위가 감정이나 욕구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의무 그 자체에서 나와야 한다. 이것은 현대적 감각에는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통찰이 있다. 칸트에게 진정한 자율(Autonomie)은 욕구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동기부여를 기다리지 않고, 기분이 좋을 때만 하지 않고, 의무로서 하는 것—이것이 자유다.
칸트는 쓴다:
"의무! 당신은 숭고하고 위대한 이름이여."
그냥 하는 것은 칸트적 의미에서 자율적 행위다. 외부 조건이나 내적 기분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부과한 법칙을 따르는 것.
공자: 습관의 도(道)
동양 철학도 같은 통찰을 가지고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반복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습(習)'은 단순한 복습이 아니라 반복적 실천을 의미한다. 지식은 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체화되어야 한다.
공자의 자기 발전 단계를 보면: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於學), 서른에 섰으며(而立), 마흔에 미혹되지 않았고(不惑), 쉰에 천명을 알았으며(知天命), 예순에 귀가 순해졌고(耳順),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 不踰矩)."
마지막 단계를 주목하라.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것은 의지력과 자연스러움의 완벽한 통합이다. 그냥 하는 것이 곧 올바른 것이 되는 경지.
이것은 오랜 실천과 수련의 결과다. 처음에는 억지로 해야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러워진다.
장자: 무위의 역설
장자는 더 나아가 '무위(無爲)'를 말한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다. '포정해우(庖丁解牛)' 이야기에서 요리사 포정은 소를 완벽하게 해체한다:
"신이 칼을 다룰 때는 신(神)으로 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관능의 작용은 멈추고 정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이것은 완벽한 숙련의 경지다.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것, 그러나 완벽하게 하는 것.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수한 반복 때문이다.
장자는 계속한다:
"좋은 요리사는 일 년에 한 번 칼을 바꾸고, 보통 요리사는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그러나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새것 같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도(道)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도는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의 확증: 행동이 감정을 만든다
철학만이 아니라 현대 심리학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자이자 철학자로서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에서 쓴다:
"우리는 행복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해서 행복해진다."
이것은 '제임스-랑게 이론(James-Lange theory)'으로 알려져 있다. 감정이 행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감정을 만든다. 동기부여를 기다리지 말라. 행동하면 동기부여가 따라온다.
현대 인지행동치료(CBT)도 같은 원리를 사용한다. 생각을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행동을 바꾸라. 행동이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Flow)』(Flow: The Psychology of Optimal Experience, 1990)에서 최적 경험의 조건을 연구했다. 흥미롭게도 몰입은 완벽한 준비에서 오지 않는다. 적절한 도전과 기술의 균형, 그리고 무엇보다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집중'에서 온다.
칙센트미하이는 쓴다:
"최고의 순간들은 보통 어렵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할 때 일어난다."
그냥 하는 것은 이 몰입 상태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신경과학: 습관의 신경회로
신경과학자 찰스 두히그는 『습관의 힘』(The Power of Habit, 2012)에서 습관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한다. 기저핵(basal ganglia)이 반복된 행동을 자동화한다. 처음에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지만, 반복하면 무의식적으로 된다.
이것은 철학적 통찰을 신경생물학적으로 확증한다. 그냥 하기를 반복하면, 뇌가 재배선된다. 끈기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최근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 연구는 더 나아간다. 뇌는 평생 변한다. 새로운 신경 연결이 만들어지고, 사용하지 않는 연결은 사라진다. "쓰거나 잃는다(use it or lose it)."
당신이 매일 글을 쓰면, 글쓰기와 관련된 신경회로가 강화된다. 당신이 매일 회피하면, 회피와 관련된 신경회로가 강화된다. 선택은 당신의 것이다.
실천철학의 통합: 그냥 하기의 다섯 차원
이제 우리는 동서양, 고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진리를 본다. 완성의 비밀은 복잡하지 않다. 그냥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함은 피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심오한 철학적 통찰들이 수렴하는 지점이다.
철학자들의 통찰을 통합하면 '그냥 하기'는 다섯 개의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1. 존재론적 차원: 행위가 존재를 만든다
사르트르, 아렌트, 하이데거가 보여주듯, 우리는 본질이 아니라 실존이다. 우리가 '하는 것'이 우리가 '있는 것'을 결정한다. 끈기 있는 자아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
2. 인식론적 차원: 앎은 함 속에 있다
비트겐슈타인, 메를로-퐁티,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듯, 진정한 지식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 속에 있다. 우리는 하면서 안다.
3. 시간론적 차원: 현재의 행위가 미래를 만든다
키르케고르의 결단, 니체의 운명애, 들뢰즈의 생성—모두 지금 이 순간의 행위가 누적되어 운명이 됨을 보여준다.
4. 윤리적 차원: 자유는 행위 속에서 실현된다
칸트의 자율, 사르트르의 자유, 공자의 도—진정한 자유는 조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조건 속에서 행위하는 것이다.
5. 실천적 차원: 습관이 성품을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푸코의 자기 테크놀로지, 장자의 무위—반복된 행위가 자동화되어 제2의 천성이 된다.
반박에 대한 답변: 왜 그냥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이는가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냥 하라는 것은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계획도 필요하고, 전략도 필요하고, 동기부여도 필요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철학적 답변을 제시해보자.
반론 1: "계획 없이 어떻게 하는가?"
하이데거가 답한다. 우리는 이미 세계 속에서 도구를 다루고 있다. 완벽한 이론적 이해가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관여가 먼저다. 계획은 하면서 만들어진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도가 영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토를 탐험하면서 지도를 그린다."
반론 2: "동기부여가 없으면 지속할 수 없다"
칸트가 답한다. 의무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 자율적 존재는 기분이 좋을 때만 행동하지 않는다.
제임스가 보충한다. 행동이 감정을 만든다. 동기부여를 기다리지 말고, 행동해서 동기부여를 만들어라.
반론 3: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해도 소용없다"
니체가 답한다. 재능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 즉 자기극복의 의지가 중요하다. 운명애를 가지고 주어진 조건을 긍정하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충한다. 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 끊임없는 실천이 탁월함을 만든다.
반론 4: "실패가 두렵다"
키르케고르가 답한다. 불안은 자유의 표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는 이 불안에도 불구하고 뛰어내릴 때 형성된다.
사르트르가 보충한다. 우리는 자유로 형벌받은 존재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반론 5: "구조적 불평등은 어떻게 하나?"
푸코가 답한다. 권력은 억압만 하지 않는다. 권력은 또한 생산한다.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우리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자기를 형성할 수 있다.
공자가 보충한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조건은 중요하지만, 그 조건 속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구체적 적용: 철학에서 실천으로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냥 하는' 것을 실천할 것인가? 철학자들의 통찰을 실용적 지혜로 전환해보자.
아침 의식: 칸트의 정언명령
칸트처럼 생각하라. "내가 지금 하는 행위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가?" 매일 아침, 의지가 아니라 의무로서 시작하라. 기분과 무관하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시작하라.
"오늘 기분이 좋으면 하겠다"가 아니라 "나는 매일 아침 8시에 시작한다"라는 법칙을 세우고, 그것을 지켜라. 이것이 자율이다.
작은 시작: 노자의 천리길
노자는 말한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千里之行 始於足下)." 완벽한 계획을 기다리지 말라. 불완전하게라도 시작하라.
들뢰즈의 말처럼, 시작은 창조의 행위다. 첫 문장을 쓰는 순간, 당신은 이미 작가다. 첫 붓질을 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화가다.
신체화: 메를로-퐁티의 습관적 신체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반복하라. 신체가 기억하도록 하라.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듯 자연스럽게, 책상에 앉는 것이 자동적이 되도록 만들어라. 의지력을 절약하라. 습관에 맡겨라.
무비판적 실행: 장자의 무위
장자의 포정처럼, 판단하지 말고 흘러가라. "이게 좋은 글인가?", "이게 올바른 방법인가?" 묻지 말라. 일단 하라. 판단은 나중에.
완벽주의는 행위의 적이다. 헤밍웨이는 말했다: "첫 번째 초고는 항상 쓰레기다(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 그러나 쓰레기를 써야 걸작을 다듬을 수 있다.
축적의 신뢰: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작은 행위들이 축적된다는 것을 신뢰하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한 번의 제비가 봄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매일의 작은 실천이 덕을 만든다.
제임스 클리어(James Clear)가 『아주 작은 습관의 힘』(Atomic Habits, 2018)에서 계산했듯, 매일 1%씩 개선하면 1년 후에는 37배 좋아진다. 수학이 이것을 증명한다: 1.01^365 = 37.78.
현재의 충실성: 하이데거의 현존재
미래의 완성을 꿈꾸지 말라.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행위에 충실하라.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 실존'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은 말한다: "설거지를 할 때, 설거지를 하라." 일을 할 때, 그 일에 온전히 존재하라. 완성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충실함 속에 있다.
실패의 철학: 완성하지 못해도 괜찮다
역설적이지만, 완성에 집착하지 말아야 완성할 수 있다. 이것은 동양 철학의 핵심 통찰이다.
노자는 말한다:
"도를 행하는 자는 날마다 덜어낸다(為道日損).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른다."
완성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다. 집착을 빼고, 완벽주의를 빼고, 결과에 대한 애착을 빼라. 그러면 행위 자체가 완성이 된다.
카뮈가 시시포스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했듯, 우리도 끝없는 미완성의 과정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위를 산 꼭대기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미는 그 행위 자체다.
베케트(Samuel Beckett)는 『워스트워드 호』(Worstward Ho, 1983)에서 쓴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나은 실패를 하라(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완성하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계속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번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다.
공동체의 힘: 혼자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보충이 필요하다. 개인주의적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산다. 끈기도 개인의 덕만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이다.
현대 심리학은 이를 확증한다. '책무성(accountability)'이 성공률을 극적으로 높인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목표를 말하라. 함께 하는 동료를 찾아라. 공개적으로 진행상황을 공유하라.
부버(Martin Buber)는 『나와 너』(Ich und Du, 1923)에서 진정한 관계를 말한다. 타자를 대상(Es)이 아니라 주체(Du)로 대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성장한다.
혼자 고립되어 의지력으로 버티려 하지 말라. 공동체를 찾아라. 함께 '그냥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라.
기술의 활용: 푸코의 자기 테크놀로지 재해석
푸코가 말한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우리는 다양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시각화: 세네카의 일기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매일 저녁 자신을 성찰했다. 현대적으로는 '진행 추적(progress tracking)'이다. 달력에 X표시를 하라. 체인을 끊지 마라. 제리 사인펠드(Jerry Seinfeld)의 방법이다.
시각적 증거는 강력하다. 축적을 눈으로 보면, 계속할 동기가 생긴다.
환경 설계: 하이데거의 도구성
하이데거가 말했듯, 우리는 환경 속에서 존재한다. 환경을 설계하라. 책상을 정리하라. 방해 요소를 제거하라. 시작하기 쉽게 만들어라.
행동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넛지(nudge)'를 자신에게 적용하라. 의지력에 의존하지 말고, 구조를 만들어라.
마이크로 커밋먼트: 제임스의 2분 규칙
"일단 2분만 하자." 이것이 데이비드 앨런(David Allen)과 제임스 클리어가 제안하는 방법이다. 시작의 저항을 낮춰라.
노자가 말했듯,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그 한 걸음을 최대한 작게 만들어라.
초월적 차원: 의미의 발견
마지막으로, 완성은 단순히 생산성의 문제가 아니다. 프랑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보여주듯,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프랑클은 쓴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매 순간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일을 완성하는 것은 삶에 대한 답변이다. 미완성으로 남기는 것도 답변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틸리히(Paul Tillich)는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 1952)'를 말한다. 불안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용기. 실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할 용기.
그냥 하는 것은 이 실존적 용기의 표현이다.
결론: 단순함 속의 심오함
수천 년의 철학적 탐구가 하나의 단순한 진리로 수렴한다: 그냥 하라.
이것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심오한 지성의 결론이다. 플라톤에서 들뢰즈까지, 공자에서 장자까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아렌트까지—모두가 같은 것을 말한다. 진정한 지혜는 행위 속에 있다고.
당신이 한 가지 일을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조건이 나빠서가 아니다.
당신이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당신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완성할 수 있는 방법도 단 하나: 그냥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자신의 행위의 총합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것이다. 오늘 하지 않으면, 당신은 오늘 하지 않은 사람이다. 오늘 한다면, 당신은 오늘 한 사람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에서 선언한 것처럼:
"이것이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날이 시작된다. 이제 올라가자!"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의 아침이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마라. 완벽한 조건을 찾지 마라. 동기부여가 샘솟기를 바라지 마라.
일어서라. 시작하라. 그냥 하라.
철학은 당신에게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철학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답은 이미 당신 안에 있다. 그것은 행위다.
후기: 이 글을 쓰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이 글의 주제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완벽한 구조를 기다리지 않았다. 모든 철학자의 원전을 다시 읽지 않았다. 완성된 모습을 미리 그리지 않았다.
그냥 시작했다. 첫 문장을 썼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썼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당신도 할 수 있다. 아니, 당신은 이미 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것도 하나의 행위다. 이제 다음 행위로 넘어가라.
그냥 하라. 철학은 이미 당신의 편이다.
주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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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ucault, Michel. L'Herméneutique du sujet.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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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erkegaard, Søren. Enten-Eller.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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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etzsche, Friedrich. Also sprach Zarathustra. 1883-1885.
- Nietzsche, Friedrich. Jenseits von Gut und Böse.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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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huangzi (莊子). Zhuangzi. 기원전 4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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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ikszentmihalyi, Mihaly. Flow: The Psychology of Optimal Experience. Harper & Row, 1990.
- Duhigg, Charles. The Power of Habit. Random House,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