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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못하는 나는 ADHD일까?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못하는 나는 ADHD일까?

집중의 불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

진단의 형이상학: 이름 붙이기의 권력

"나는 ADHD일까?"라는 질문은 단순한 의학적 질의가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 질문이다. 나는 '무엇'인가? 내 본질은 규정될 수 있는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의학적 진단이 어떻게 권력의 도구가 되는지 분석했다. 18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광기'라는 범주가 만들어지면서, 특정한 행동 양식을 보이는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ADHD 역시 1980년대에야 공식적인 진단명으로 등장했다. 그렇다면 1979년에 집중하지 못하던 사람들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갑자기 1980년에 ADHD가 '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본질주의와 구성주의의 긴장을 목격한다. ADHD는 발견된 것인가, 아니면 발명된 것인가? 뇌의 도파민 수치와 전두엽 활동이라는 생물학적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발견'이다. 그러나 무엇이 '정상적' 집중력이고 무엇이 '비정상적' 산만함인지를 규정하는 기준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주의집중의 현상학: 의식의 흐름과 단절

제임스는 의식을 '흐름(stream)'으로 묘사했다. 의식은 끊임없이 흘러가며, 한 순간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면 '집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흐름을 인위적으로 한 지점에 고정시키려는 시도가 아닐까?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집중의 경험을 분석해보자. 나는 책을 읽고 있다. 그러나 '나'라는 주체와 '책'이라는 대상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이 존재한다. 책의 문장이 의식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고, 다음 문장이 '지금'이 되며, 아직 읽지 않은 문장은 '미래'로 남는다. 의식은 이 세 층위를 동시에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과연 쉬운 일인가?

메를로-퐁티는 신체의 지향성을 강조했다. 우리의 주의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를 통해 세계와 맺는 관계다. 어떤 사람에게는 책상 위의 책이 자연스럽게 신체-주체의 중심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창밖의 새소리, 의자의 감촉, 떠오르는 기억이 동등한 무게로 의식을 잡아당긴다. 이것은 비정상인가, 아니면 세계와의 다른 관계 맺기 방식인가?

시간성의 위기: 현재에 머무르기의 불가능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가 '시간성'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항상 이미 과거를 짊어지고 있으며(기투성), 동시에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투사). 진정한 '현재'는 이 두 지평이 만나는 순간적 교차점에 불과하다.

ADHD적 경험은 어쩌면 이 시간성의 극단적 표현일 수 있다. 과거의 미완성된 과제들이 의식을 괴롭히고, 미래의 무수한 가능성들이 동시에 손짓한다.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일에 집중한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개의 거대한 중력장을 무시하고 현재라는 가느다란 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베르그송의 '지속(durée)' 개념은 또 다른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시간을 공간화하는 것, 즉 시간을 측정 가능한 단위들로 나누는 것이 시간의 본질을 왜곡한다고 보았다. '25분 집중', '5분 휴식'과 같은 시간 관리 기법은 시간을 공간적 단위로 환원한다. 그러나 의식의 실제 흐름은 이런 기계적 분할을 따르지 않는다. 어떤 5분은 영원처럼 느껴지고, 어떤 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다원적 자아: 나는 누구인가?

니체는 "주체는 허구다"라고 선언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무수한 충동, 욕망, 의지의 복합체다. 데카르트의 통일된 자아('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환상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rhizome)' 개념을 제시한다. 나무처럼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언제든 새로운 연결을 만드는 구조. 이것이 ADHD적 사고방식과 놀랍도록 닮아있지 않은가?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단일한 '나'라는 허구를 유지하는 데 실패한다는 뜻일 수 있다. 내 안에는 책을 읽고 싶은 나, 음악을 듣고 싶은 나, 운동을 하고 싶은 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은 나가 공존한다. 이들은 투표를 통해 합의에 이르지 않는다. 그들은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요구하며, 동시에 나를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주의경제학: 자본주의와 집중의 상품화

버나드 스티글러는 『주의의 경제학』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우리의 주의력을 어떻게 착취하는지 분석한다. 우리는 무한한 자극의 폭격 속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알림, 소셜미디어 피드, 이메일, 메신저—이 모든 것이 우리의 주의를 '포획'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를 "성과사회"로 규정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해야 한다'는 강제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긍정성에 의해 지배받는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고, 끊임없이 최적화해야 하며, 끊임없이 생산적이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일에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기회비용을 최소화해야 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ADHD는 개인의 병리가 아니라 병든 사회에 대한 정상적 반응이 아닐까? 집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집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적 조건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규범성의 문제: 누가 정상을 정의하는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경험의 조건을 탐구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보편적' 인식 구조가 과연 정말 보편적일까?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운동은 바로 이 질문을 제기한다.

신경다양성 관점에서 보면, ADHD는 치료되어야 할 장애가 아니라 인간 뇌의 자연스러운 변이다. 마치 왼손잡이가 비정상이 아니듯, 비신경전형적(non-neurotypical) 뇌도 비정상이 아니다. 단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윤리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만약 ADHD 성향이 학업 실패, 직장 부적응, 관계의 어려움을 야기한다면? 고통받는 당사자에게 "당신은 그저 다를 뿐"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느끼는 무한한 책임을 말했다. 집중하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를 사회에 적응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를 그에게 맞춰야 하는가?

자유의 역설: 의지와 신경화학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를 부정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현대 신경과학은 스피노자를 지지하는 듯 보인다. 우리의 결정은 의식적 선택 이전에 뇌에서 이미 시작된다.

ADHD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이라면, '집중하려는 의지'는 무의미한 것일까? 나는 집중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집중하지 '않는' 것인가? 이 구분이 가능하기나 한가?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며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뇌의 화학작용이 나의 선택을 규정한다면, 나는 정말로 자유로운가?

역설적이게도, ADHD 진단은 자유를 회복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나는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ADHD다"라는 인식은 자기비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나는 내 뇌의 화학작용의 노예다"라는 결정론적 자기이해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창조성과 혼돈: 무질서의 생산성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다. "별을 낳으려면 자신 안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창조적 천재들이 ADHD 성향을 보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무수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완성한 것은 소수였다. 모차르트는 산만하고 충동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창조적 사유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생성이라고 본다. 직선적이고 집중적인 사고는 이미 정해진 궤도를 따라간다. 그러나 산만한 사고는 예상치 못한 연결을 만들고,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며, 혁신적 통찰로 이어질 수 있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개념도 관련이 있다. 생명은 예측 가능한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창조와 생성이다. 집중하지 못하는 마음은 어쩌면 이 생명의 본질적 역동성을 더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일 수 있다.

존재의 불안: 멀티태스킹이라는 실존적 전략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불렀다.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느끼는 어지러움.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근본적으로 '세계-내-존재'라고 했다. 우리는 세계와 분리된 주체가 아니라,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다. ADHD적 경험은 이 '던져짐'의 극단적 형태일 수 있다. 세계의 무수한 요구, 자극, 가능성이 동시에 나를 붙잡으려 한다. 나는 선택하기 전에 이미 선택당한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하려는 것은 실존적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일 수 있다. 아무것도 완전히 시작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을 조금씩 하면 어느 하나도 온전히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나쁜 것일까? 아니면 압도적인 세계 앞에서의 지혜로운 생존 전략일까?

치료의 윤리학: 적응인가, 해방인가?

약물치료는 효과적이다. 메틸페니데이트는 도파민 재흡수를 억제해 집중력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푸코는 묻는다: 누구를 위한 치료인가?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고통을 완화하지만, 동시에 고통의 원인인 구조적 문제를 은폐한다. ADHD 약물도 마찬가지는 아닐까? 그것은 개인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적응하도록 돕는가, 아니면 진정으로 그를 자유롭게 하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의학이 '탈영토화'하는 욕망을 '재영토화'한다고 비판한다. 기존 질서를 벗어나려는 충동이 '증상'으로 병리화되고, 치료를 통해 다시 질서 안으로 포섭된다.

그러나 당사자의 고통은 실재한다. 관념적 비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판적 페미니즘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고 말했듯, 우리는 구조적 비판과 개인의 안녕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정체성의 정치학: '나는 ADHD다' vs '나는 ADHD를 가지고 있다'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명명하느냐는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하느냐를 결정한다.

"나는 ADHD다"라는 정체성 선언은 신경다양성 운동의 언어다. 이것은 ADHD를 본질적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자랑스러운 정체성의 일부로 만든다. 반면 "나는 ADHD를 가지고 있다"는 의료 모델의 언어로, ADHD를 외부의 것, 소유물, 치료 가능한 조건으로 본다.

버틀러의 수행성(performativity) 이론은 통찰을 제공한다. 정체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반복적 수행을 통해 구성된다. 내가 나를 'ADHD인 사람'으로 반복해서 말하고 행동할 때, 그것이 나의 실재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도 있다. 정체성이 감옥이 될 수 있다. "나는 ADHD니까 할 수 없어"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 사르트르가 경고했듯, 우리는 '자기기만(bad faith)'에 빠질 수 있다. 자유로운 존재임을 부정하고, 자신을 고정된 본질을 가진 사물처럼 취급하는 것.

공동체와 인정: 함께 산만하기

헤겔은 자기의식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고 보았다. 나는 타자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비로소 나 자신이 된다. ADHD 당사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는 바로 이 인정의 공간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은 치유적이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적 연대'가 형성된다. 위계적이고 중심화된 조직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탈중심적인 연결망. 각자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전략을 나누며, 서로를 지지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경고했듯, 동일성에 기반한 공동체는 배제의 위험을 갖는다. 'ADHD인 우리'는 'ADHD가 아닌 그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어떻게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배제하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의미의 추구: 시시포스는 행복했을까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묻는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처럼, 매일 집중하려 애쓰고 매일 실패하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카뮈의 답은 명확하다. "시시포스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완벽한 집중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시도하는 그 자체에서.

프랑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썼다. ADHD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창조해야 한다.

결론: 질문과 함께 살아가기

"나는 ADHD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철학적 답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답을 거부하는 것이 철학적 태도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진정한 지혜는 확실성이 아니라 질문하는 능력에 있다. 우리는 질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당신이 ADHD인지 아닌지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싶은가다. 진단명은 때로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당신의 전부는 아니다. 당신은 진단명을 넘어선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언한다. "질문들을 사랑하라. 지금은 답할 수 없는 질문들 속에서 살아가라.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질문들 자체를 살아가라."

집중할 수 없는 당신은, 어쩌면 세계의 복잡성을 너무나 정직하게 경험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단순화를 거부하고, 모순을 껴안으며, 불확실성 속에서 용기 있게 존재하는 사람.

그것이 ADHD든 아니든, 당신은 당신의 방식으로 세계와 씨름하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다.